하나님 나라 백성의 징표 '여호와께 성결'
스가랴 14:12-21 (맥락: 12:10; 13:1,7 참조)
핵심 메시지: “우리의 성결한 삶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예물이며, 그 주권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백성의 응답이다”
엄마, 내가 그린 그림 줄게
어느 날 한 어머니가 다섯 살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생일선물로 뭘 주고 싶어?” 아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엄마, 내가 그린 그림 줄게!”
그 그림은 객관적으로 보면 형편없었습니다. 삐뚤빼뚤한 선, 색깔도 엉망이었죠. 하지만 그 어머니는 그 그림을 액자에 넣어 거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었습니다. 왜일까요? 그 그림 속에 아들의 마음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엄마를 향한 사랑,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그 서툰 그림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사랑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연스럽게 그 사랑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까? 억지로가 아니라, 기쁨으로 말입니다. 뭔가 해드리고 싶고, 그 사랑을 기념할 선물을 주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오게 됩니다.
스가랴 14장 12절부터 21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은 이러하니 곧 섰을 때에 그들의 살이 썩으며 그들의 눈동자가 눈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들의 혀가 입 속에서 썩을 것이요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크게 요란하게 하시리니 피차 손으로 붙잡으며 피차 손을 들어 칠 것이며 유다도 예루살렘에서 싸우리니 이 때에 사방에 있는 이방 나라들의 보화 곧 금 은과 의복이 심히 많이 모여질 것이요 또 말과 노새와 낙타와 나귀와 그 진에 있는 모든 가축에게 미칠 재앙도 그 재앙과 같으리라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땅에 있는 족속들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비 내림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이방 나라들의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애굽 사람이나 이방 나라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가 받을 벌이 그러하니라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이 기록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현실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성전은 폐허가 되어 있었고, 경제는 파탄 상태였으며, 주변 민족들의 위협은 계속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우리와 함께 계시기는 한 것인가?’ 혹시 여러분도 이런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데도 현실이 너무 힘들고 절망적일 때,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나?’ 하는 의문이 들면서 신앙의 끈을 느슨하게 잡게 되는 순간들 말입니다.
바로 그런 때에 하나님께서는 스가랴를 통해 놀라운 미래를 보여주십니다. ‘그 날’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질문이 들지 않습니까? ‘이것은 2500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약속인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약속이 주어질 수 있을까?’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함께 나누는 이유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하나님 나라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나라에서 가장 놀라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모든 것이 ‘여호와께 성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말의 방울부터 부엌의 솥까지, 전쟁에서 사용하는 도구부터 일상에서 쓰는 그릇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께 드려집니다.
이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것은 마치 국적을 나타내는 징표와 같습니다. “나는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입니다”라는 정체성의 표시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해외에 나가면 여권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 여권이 여러분의 국적을 증명하는 징표인 것처럼, '여호와께 성결'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국적을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강요나 의무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그 나라의 국기를 자랑스럽게 게양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고민해볼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우리는 어떻게 그 사랑을 삶 전체로 표현하며, 하나님 나라 백성의 국적을 자랑스럽게 드러낼 것인가?”
그리고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이 있습니다. ‘여호와께 성결’을 징표로 삼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으로 인정하시고 끝까지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을 우리 삶 전체로 기쁨으로 표현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임져 주신다는 확신 가운데 살아가는 은혜를 발견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재앙급 결의, 창조적 파괴” - 주권을 돌려드림 (14:12-15)
12절부터 15절까지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은 이러하니 곧 섰을 때에 그들의 살이 썩으며 그들의 눈동자가 눈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들의 혀가 입 속에서 썩을 것이요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크게 요란하게 하시리니 피차 손으로 붙잡으며 피차 손을 들어 칠 것이며 유다도 예루살렘에서 싸우리니 이 때에 사방에 있는 이방 나라들의 보화 곧 금 은과 의복이 심히 많이 모여질 것이요 또 말과 노새와 낙타와 나귀와 그 진에 있는 모든 가축에게 미칠 재앙도 그 재앙과 같으리라
12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은 이러하니” 여기서 '재앙'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마게파'(מַגֵּפָה)는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 재앙의 모습이 얼마나 철저한지 보십시오. “섰을 때에 그들의 살이 썩으며 그들의 눈동자가 눈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들의 혀가 입 속에서 썩을 것이요” 하나님 나라에 대적하는 모든 세력들이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완전히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이 때에 사방에 있는 이방 나라들의 보화 곧 금 은과 의복이 심히 많이 모여질 것이요” 그리고 15절, “또 말과 노새와 낙타와 나귀와 그 진에 있는 모든 가축에게 미칠 재앙도 그 재앙과 같으리라”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가졌다 해도, 아무리 강한 군대와 가축들을 보유했다 해도 하나님 나라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재앙은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정화 작업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정화는 파괴가 아닌 회복입니다.”
스가랴 12장 10절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그리고 13장 7절,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이 말씀들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며 애통해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고 명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복음의 핵심이 있습니다. 심판이 먼저 메시아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정화의 역사가 먼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목자를, 당신의 짝 된 자를 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찔림을 당하시고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두려움이 아닌 감사로 하나님께 주권을 돌려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궁극적 예물이었습니다.
그 예물로 인해 우리는 이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의로운 통치에 기쁨으로 동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창조적 파괴입니다.
여러분, 우리 삶에도 회복을 위한 창조적 파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정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회복시키시기 위해 파괴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내 삶의 어떤 영역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가? 무엇이 창조적으로 파괴되어야 하는가?’
각자의 삶이 다르듯, 파괴되어야 할 것들도 모두 다릅니다. 어떤 분에게는 성공에 대한 집착일 수 있고, 어떤 분에게는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분에게는 내 안전과 편안함을 지키려는 마음이거나, 모든 것을 내가 통제하려는 욕구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회복시키기를 원하시는지, 그를 위해 무엇이 파괴되어야 하는지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 가벼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정화 작업은 재앙 수준의 철저함입니다.
과거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품질혁명을 위해 15만 대의 핸드폰을 한꺼번에 불태워버렸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만약 그때 ‘조금씩 개선해보자’, ‘점진적으로 바꿔보자’는 수준이었다면 지금 같은 글로벌 삼성은 절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 재앙급 결의, 그 뼈를 깎는 각오가 삼성을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정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회복시키시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결의가 필요합니다. ‘이것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함으로, 과거와 완전히 결별하는 각고로 창조적 파괴에 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혼자 무모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가정이나 교회 공동체와 상의하고, 재정적·관계적 리스크를 신중히 평가해야 합니다. 창조적 파괴는 지혜로운 결단이어야 하지, 충동적인 파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억지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니라 회복을 위한 창조적 파괴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에도 회복을 위한 창조적 파괴가 필요합니다.
혹시 우리가 교회의 의사결정을 할 때 하나님의 뜻보다는 사람들의 눈치를 더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역의 성과를 평가할 때 하나님 나라의 가치보다는 세상적인 기준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각 교회마다, 각 공동체마다 창조적으로 파괴되어야 할 것들이 다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인지 함께 찾아보고, 재앙급 결의로 그 변화에 임하되, 공동체의 지혜와 상호 책임 안에서 진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회복을 위한 창조적 파괴는 단순한 자기계발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주권을 돌려드리는 믿음의 선언입니다.
‘하나님, 이제 주님이 제 삶의 진정한 주인이십니다. 제가 붙잡고 있던 이것들을 과감히 내려놓겠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드리는 첫 번째 예물입니다. 주권을 돌려드리는 믿음의 예물 말입니다.
“정화된 백성에게는 새로운 예배가 시작됩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드리는 예배” - 만국의 순례 (14:16-19)
16절부터 19절까지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땅에 있는 족속들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비 내림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이방 나라들의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애굽 사람이나 이방 나라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가 받을 벌이 그러하니라
16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놀라운 반전입니다. 방금 전까지 예루살렘을 치던 대적들이 이제는 예배하러 올라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이 일을 하시는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만국을 부르시고 이끄시는 것입니다.
초막절의 의미를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보호와 임재를 기념하는 절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삶을 책임지시고 인도하심에 의지한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출애굽 때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 그것이 예배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목자처럼 책임지고 인도하셨던 그 역사가 이제 만국에게까지 확장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국이 초막절을 지키러 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단순히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자 되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일하심에 동참한다는 고백입니다. 예배는 바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땅에 있는 족속들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만국이 올라와 경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루시는 하나님 나라의 우주적 확장입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 중심지가 되는 것도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이라는 표현을 주목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나라 질서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의미입니다.
18-19절에서는 애굽을 구체적인 예로 들면서 이 원리를 더욱 분명히 합니다.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비 내림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이방 나라들의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애굽 사람이나 이방 나라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가 받을 벌이 그러하니라”
하나님 나라의 예배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이를 보장하고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환상이 신약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보십시오.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친히 책임지고 이루어가심을 봅니다.
요한복음 7장 37-39절을 기억하십시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른 바와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바로 초막절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스가랴가 본 그 환상을 예수님께서 친히 성취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참 목자가 되시고, 성령께서 이 일을 계속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 성령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계시록 21-22장의 새 예루살렘에서의 완전한 예배, 그리고 마태복음 28장 19절의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는 명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서 제자 삼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족속을 당신께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게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혹시 개인의 영성을 위한 시간, 나를 위로받는 시간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스가랴가 보여주는 예배는 전혀 다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목자 되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나라를 확장시키시는 그 일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과거에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대적들이 이제는 예배하러 올라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놀라운 것은 단순히 몇 개 나라가 아니라 ‘땅에 있는 족속들’, 즉 모든 민족이 예배의 자리로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절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민족의 마음을 돌이키셔서 당신께로 이끄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경험해야 할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의 일에 동참하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 말입니다.
주일예배의 새로운 관점
우리가 드리는 주일예배를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관점으로 바라보십시오.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 이 찬양을 통해 어떤 일을 하고 계시며, 나는 어떻게 동참하는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통해 어떤 일을 하시며, 나는 어떻게 그 일에 참여하는가?’,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어떤 일을 하시며, 나는 어떻게 그 일의 동역자가 되는가?’, 헌금할 때 ‘하나님께서 이 헌금을 통해 어떤 일을 하시며, 나는 어떻게 그 일에 동참하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가정예배의 회복
여러분, 혹시 가정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예배를 드려보신 적이 있습니까? 많은 분들이 ‘가정예배는 어렵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가정예배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드리는 예배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이 가정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존재가 바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일이 아닙니까?
스가랴가 본 환상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을 당신께로 이끄셔서 예배하게 하십니다. 우리 가정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통해서도 당신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가정예배는 바로 가정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가정을 통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내일은 어떤 일에 동참하게 하실지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시간 말입니다.
주 1회, 10분만 투자해보십시오. 처음 드려보시는 분들을 위해 간단한 가이드를 제안드립니다.
하나님 나라 가정예배 가이드 (10분)
- 1분: "주 다스리네" 찬양 (또는 가족이 좋아하는 찬양)
- 3분: 스가랴 14:20-21 (또는 말씀 함께 읽기)
- 4분: 나눔 – ‘오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우리가 어떻게 동참했나?’
- 2분: 하나님께서 내일 하실 일에 동참할 수 있도록 기도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닙니다. 가정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교회의 모든 사역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동참하는 것임을 믿으십시오. 선교와 전도도, 우리의 사회적 책임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이 지역 사람들에게 ‘저 교회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증거가 되는 것도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통해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시작된 예배는 이제 온 세상으로 흘러갑니다.”
“위선을 벗고 진짜가 되다” - 전방위적 성결 (14:20-21)
20절부터 21절까지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20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놀라운 장면입니다. ‘말 방울에까지’ - 전쟁에서 사용하는 말의 방울까지도 거룩하게 구별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 성전에서 사용하는 평범한 솥들이 제단 앞의 거룩한 주발들과 동일한 수준이 됩니다.
‘여호와께 성결’의 히브리어 의미를 주목하십시오. קֹדֶשׁ לַיהוָה (kodesh la-YHWH) - 이것은 단순한 도덕적 순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구별되어 소속됨,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 핵심을 의미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 집집마다 있는 부엌의 솥까지도 하나님의 성물이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이 중요합니다.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 여기서 ‘가나안 사람’은 단순히 민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어로 ‘가나안’은 ‘장사꾼’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어서, 이것은 거룩을 상품화하는 장사꾼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거룩이 상품이 아닌 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이 환상이 예수님 시대에 어떻게 나타났는지 보십시오.
마가복음 11장의 성전 정화 사건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이것이 바로 스가랴 14:21의 성취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배와 거룩함의 상품화를 거부하시고, 삶 전체가 성전이 되는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3-16절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일상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삶입니다. 우리의 모든 일상이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완전한 성결의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성령의 능력으로 진정한 성결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정체성을 말하기 전에 먼저 회개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지 그 근본 원인을 직면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확실한 정체성의 결여 때문입니다. 우리는 입으로는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시다’라고 말하지만, 마음으로는 진정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도 혼란스럽고, 타인이 보기에도 일관성 없는 이중인격자 같은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는 목사이지만, 장로이지만, 권사이지만, 집사이지만 오히려 그 직분 때문에 솔직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닙니까? 교회를 10년, 20년 다녔어도 하나님께서 진정한 주인이셨던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결단 없이 살아왔던 것이 문제가 아닙니까?
주일에는 ‘나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평일에는 ‘세상에 속한 사람’처럼 살고, 교회에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인 척 하면서 일상에서는 완전히 다른 정체성으로 사는 것,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진정한 주인이심을 경험하지 못하고, 결단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 우리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보소서. 직분은 있어도 진정한 경험은 없고, 오랜 신앙생활은 있어도 결단은 없었던 우리를 용서해 주소서.
여러분,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우리를 성결하게 하시는가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그 날에는’, ‘성물이 될 것인즉’ - 이것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완벽해져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당신께 속한 존재로 구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구별하시고, 우리의 일상을 당신께 속한 것으로 만드십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속한 존재라는 정체성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 정체성을 일관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관점의 성결 체크리스트
이번 주 다음 중 한 가지를 선택해서 실천해보십시오.
하나님께 속한 사람답게 말하는 것입니다. 뒷말이나 과장, 비난하는 말을 끊고, 대신 격려와 소망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으로 소통하는 것입니다. 공감이나 사실확인 없이 내용을 공유하는 것을 금지하고, 감사와 소망의 내용을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존재답게 청지기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비공식 지출을 투명하게 하고, 나눔과 베풂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불화가 있는 상대 1인과 화해를 시도하고, 먼저 용서하며 화해의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답게 정직과 성실로 일하는 것입니다. 보고할 때 숫자나 성과를 포장하지 않고 정직하게 하며, 직장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존재로서 복음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한 명에게 선대나 초대를 실천하고, 말보다는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각자의 삶이 다르듯, 하나님께서 성결하게 하시는 영역도 다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당신께 속한 존재로 구별하셨다는 확신 가운데서 그 정체성을 일관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루를 이기도로 시작해보시면 어떨까요?
“주님, 오늘 저의 말·돈·관계·일·디지털을 ‘여호와께 성결’로 구별합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사역이 하나님 나라 확장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점검해보십시오. 우리의 예배, 교육, 친교, 봉사 모든 것이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도들의 직업과 일상이 하나님께 속한 존재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도록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드러낼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를 위해 정기적으로 서로 점검하는 시간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이번 주 내가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정체성을 어떻게 드러냈는지, 하나님 나라 백성답지 못하게 타협했던 부분이 있다면 솔직하게 고백하며 어떻게 돌이킬지 함께 고민해보십시오. 그리고 다음 주에는 어떤 약속을 함께 지켜나갈지 서로 다짐하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의 모든 일상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됩니다.”
“서툰 그림이 명작이 되는 순간”
기억하십니까? 오늘 설교 처음에 5살 아들이 엄마 생일선물로 서툰 그림을 그려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그림은 객관적으로 보면 형편없었지만, 엄마는 그것을 액자에 넣어 거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었습니다. 왜일까요? 그 그림 속에 아들의 사랑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스가랴의 환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말 방울부터 부엌의 솥까지, 우리 일상의 모든 영역이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사랑의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 우리가 자연스럽게, 기쁨으로 그 사랑을 삶 전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호와께 성결’은 우리가 해외에서 여권을 보여주듯 하나님 나라 백성의 국적을 증명하는 징표입니다. ‘나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입니다’라는 자랑스러운 정체성의 표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정화하셨기에 우리는 주권을 돌려드릴 수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배로 부르셨기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 확장에 동참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결하게 하셨기에 우리는 그 정체성을 기쁨으로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께 성결한 삶 → 하나님 나라 백성의 징표 → 하나님께서 책임지심”이라는 놀라운 약속입니다.
스가랴 13장 1절을 기억하십시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그리스도의 피로 가능해진 성결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한 예배적 삶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현실이 우리 삶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스가랴 14장 말씀 앞에서 여러분은 어떤 결단을 하시겠습니까?
첫째, 하나님 나라 관점 성결 체크리스트 중 한 영역을 선택하는 것은 어떨까요? 언어든, 디지털이든, 재정이든, 관계든, 업무든, 이웃이든 이번 주부터 하나님께 속한 존재로서의 정체성을 일관되게 드러낼 한 영역을 정하는 것 말입니다.
둘째, ‘내 삶 전체를 하나님 나라 확장의 예물로 드리겠습니다’라고 마음으로 고백하는 것은 어떨까요? 주일예배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예배를 드리겠다고 다짐하는 것 말입니다.
셋째, 함께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것은 어떨까요? 서로의 정체성을 격려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징표를 자랑스럽게 드러내도록 도울 것을 약속하는 것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결단을 하실 때,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스가랴 14장의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친히 만국을 당신께로 이끄시고, 모든 것을 성결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작은 결단을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실 것이며, 여러분이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낼 때마다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인정하시고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 여러분을 통해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함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모든 일상이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고백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성결한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확장되게 하소서.
우리의 삶 전체가 주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확신하며, 주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책임져 주실 것을 믿고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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