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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빛 컨텐츠/설교

무너진 땅에 돌아온 회복 백성이 사는 법 - 스가랴 8:14-23

by rev. 새벽빛 2025. 8. 18.

무너진 땅에 돌아온 회복 백성이 사는 법

스가랴 8:14-23

 

 

1. 꿈과 현실 사이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주간 기대하신 대로 이루시며 사셨나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스가랴서의 말씀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그들은 70년간의 포로 생활을 끝내고 고향 땅으로 돌아왔지만, 현실은 그들이 꿈꾸던 것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성전은 재건 중이었지만 여전히 초라했고,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으며, 주변국들의 위협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이게 정말 하나님이 약속하신 회복인가?"라는 의문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습니까? 교회에 나가면 꼬인 문제들이 해결될 줄 알았는데, 여전히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믿음생활을 하면 마음에 평안이 올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많은 고민과 질문들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인생이 순탄해질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이 오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각자의 '무너진 땅'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은 취업난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고민하고, 중년의 직장인들은 이직에 대한 부담과 경제적 압박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월세와 전세 대란으로 인한 주거 불안은 많은 가정을 힘들게 하고 있고,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라는 막막함이 우리 마음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관계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에서는 성과 압박과 인간관계의 갈등으로 지쳐가고, 가정에서도 각자 바쁜 일상에 쫓겨 진짜 대화는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조차 피로감을 느끼며 진정한 소속감을 찾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나는 이 정도면 실패한 인생인가?"라는 자책과 남들과 비교하며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이 뭔지도 모르겠다"는 무기력감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는 만성적인 스트레스와 불안, 우울감에 시달리며, 쉬어도 쉰 것 같지 않은 피로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렇게 힘든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문제가 해결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음의 진정한 평안과 쉼을 원하고, 진실하고 안전한 관계를 갈망하며, 나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자존감과 삶의 의미와 방향성을 찾고 싶어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런 현실 속에서 회복 백성에게 어떤 삶을 제시하고 계실까요? 무너진 땅에서도 가능한 진짜 회복이 있을까요?

 

 

1. 돌아온 사랑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조상들이 내 화를 돋우었을 때 내가 너희에게 재난을 내리기로 마음먹고 너희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제 내가 마음을 돌려 예루살렘과 유다 백성들에게 은혜 베풀기로 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 - 우리말 성경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정말 놀라운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러나 이제라는 표현입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재난을 내리기로 마음먹고 작정하신 심판을 철회하지 않으셨지만’, 이제는 마음을 돌려 은혜를 베풀기로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음을 돌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샤브티(שַׁבְתִּי)'인데, 이는 내가 다시 선을 행하기로 작정했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훈계할 때를 생각해보세요. 훈계하는 동안에도 사랑은 변하지 않았지만, 훈계라는 특별한 상황이었던 거죠. 그리고 훈계가 끝나면 다시 원래의 따뜻한 품으로 돌아가잖아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징계하시는 동안에도 사랑은 변하지 않으셨지만, 이제 그 징계의 목적이 이루어졌으니 원래의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변덕스럽다는 뜻이 아니라 언약적 신실함을 재확인하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것은 관계 회복을 향한 하나님의 일관된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징계하신 이유는 우리를 망하게 하려는 게 아니라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었고, 이제 그 목적이 이루어졌기에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마음이 우리를 향해 있음을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현재의 어려움이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셨다는 증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취업이 안 되고, 관계가 힘들고, 미래가 불안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마음먹고 계십니다. 이 어려움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는 증거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에 변화를 요구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원래의 사랑으로 돌아오셨다면, 우리도 원래의 모습, 즉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정직하고 진실한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지만, 그 은혜를 받은 우리에게는 합당한 응답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은 75세의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그런데 실제로 약속의 아들 이삭을 얻기까지 25년이 걸렸습니다. 25년 동안 아브라함은 단순히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믿음을 연단받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해가는 시간이었습니다. 때로는 조급해져서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으려고 시도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은 인내하시며 아브라함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회복의 과정 중에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야 합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진리를 사랑하는 정직한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기로 마음먹으심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은혜는 단순히 문제 해결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의미합니다. 그 관계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평안과 삶의 의미를 찾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바로 진리를 사랑하고 화평을 추구하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선을 베풀기로 작정하셨다면, 우리의 첫 응답은 진리를 사랑하는 정직입니다.

 

 

2. 가면을 벗고 진리를 사랑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16절 전반부에서 하나님은 너희는 이것을 행할지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과 진실을 말하며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원래의 사랑으로 돌아오셨다면, 우리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의 원래 모습은 정직하고 진실한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죄로 인해 우리는 기만과 거짓에 물들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진리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지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가장 많이 기만합니다. ‘나는 괜찮아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마음이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이건 다 상대방 때문이야라고 하면서 자신의 책임은 회피합니다. ‘나는 믿음이 좋아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의심과 두려움으로 가득합니다. ‘시간이 해결해줄 거야라고 하면서 사실은 회피하고 미루고 있습니다. 이런 자기기만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진정한 회복은 불가능합니다.

 

왜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걸까요? 두려움 때문입니다.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무섭기 때문입니다. 수치심 때문입니다. 내 연약함이 드러나는 것이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자존심 때문입니다.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자기기만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경험할 수 없습니다.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먼저 하나님 앞에서 가면을 벗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도 꾸미지 않은 날것의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의심과 두려움, 원망도 솔직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아 보여야 한다는 부담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한 모습이 아니라 정직한 마음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시편에서 자신의 모든 감정을 하나님께 토해낸 것처럼 말입니다.

 

바울 사도도 거짓을 버리고 각각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4:25)고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정직함은 자연스럽게 관계로 확장됩니다. 가족에게 괜찮다는 거짓말 대신 사실 요즘 좀 힘들어라고 솔직히 말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체면치레가 아닌 정직한 소통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형식적 인사가 아닌 진실한 관심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리를 말하고 진실한 재판을 하려면 정직이라는 당당함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자기기만에 빠진 사람은 남에게 진실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내가 먼저 정직해야 남에게도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어떻게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는 하나님을 속여야 하고 자기 자신도 속여야 하는 기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고서는 삶을 살아낼 수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회복된 것 같아도 속은 여전히 무너진 상태일 뿐입니다.

 

하지만 진리를 사랑하는 삶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정직해질 때, 비로소 다른 사람들과도 진실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자기기만에 빠진 사람은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쉽지만,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한 사람은 남의 연약함도 이해하게 됩니다. 내 상처와 실패를 솔직히 인정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상처도 공감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작은 진실함들이 모여서 우리 삶을 회복시킵니다. 진실한 관계에서 우리는 진정한 위로와 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정직한 마음을 기뻐하시며 더 깊은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리고 이런 개인적 정직함이 바로 공동체의 화평으로 이어지는 첫걸음이 됩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삶, 이것이 회복 백성이 사는 첫 번째 방식입니다.

 

정직은 개인에서 시작해 관계로 확장됩니다. 그래서 다음 걸음은 화평을 세우는 성숙입니다.

 

 

3. 갈등을 다루어 화평을 세우다

 

16절 후반부와 17절에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지며 마음에 서로 해하려 하는 것을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공동체적 차원으로 확장되는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지며라는 말씀은 화평이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갈등을 올바르게 다루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는 문제를 덮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기반으로 한 공동체적 정의 구현을 의미합니다. 스가랴가 말한 성문에서의 재판은 개인감정보다 공동체의 공정과 정의를 세우라는 초대입니다. 또한 마음에 서로 해하려 하는 것을 도모하지 말며라는 말씀은 소극적으로는 해하지 않는 것이지만, 적극적으로는 서로의 유익을 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 5:9)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2:18)고 권면했습니다. 화평을 사랑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성품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정한 화평과 거짓된 화평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에서 하나님은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6:14)라고 거짓 평안을 책망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도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며’( 4:15)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진리와 화평이 함께 가야 함을 보여줍니다. 진정한 화평은 문제를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해결하는 것이고, 갈등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건설적으로 다루는 것입니다.

 

바울이 할 수 있거든이라고 전제한 것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에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학대·폭력·괴롭힘과 같은 유해한 상황은 참는 것이 화평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먼저 즉시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고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화평은 악을 방치하는 침묵이 아니라, 진리 위에 선 정의로운 화해입니다.

 

과거 한 교회에서 리더십의 실수가 있었을 때,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문제를 덮고 가자고 제안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화평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화평은 문제를 덮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회개와 투명한 소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야말로 진리와 화평이 함께 가는 모범을 보여야 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무너진 땅에서 화평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먼저 이것은 상처받은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힘든 상사나 동료와의 관계도 단절로 해결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족 간의 갈등도 시간이 걸려도 화해의 길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과는 안 된다는 판단보다 어떻게 하면 될까?’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화평을 사랑하는 마음의 출발점입니다.

 

또한 화평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 권리보다 공동체의 회복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화평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조건 참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화평을 사랑한다고 해서 불의에 침묵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사랑하기 때문에 단호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진정한 화평은 진리 위에 세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화평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옳다고 해도 팀의 화합을 위해 양보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는 내 편의보다 가족 전체의 평화를 위한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내 의견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우선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화평을 사랑한다는 것은 갈등을 성숙하게 다루는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한 박자 쉬는 것입니다. 문제와 사람을 분리해서 접근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문제다대신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까?’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물론 화평을 추구했지만 상대방이 거부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억지로 화해를 강요하지 말고, 내 마음의 평안을 먼저 지키며 때를 기다리는 것도 지혜입니다. 때로는 내가 먼저 사과해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상대방의 변화를 기다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성숙한 태도가 갈등을 해결의 기회로 바꾸어 놓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말한 것처럼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게”( 3:18) 될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3:15)는 말씀처럼, 내면의 평안이 관계의 화평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화평을 사랑하는 삶, 이것이 회복 백성이 사는 두 번째 방식입니다.

 

그렇게 걸을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슬픔의 금식을 기쁨의 절기로 바꾸십니다.

 

 

4. 금식이 절기가 되는 은혜

 

그렇다면 우리가 진리와 화평을 사랑하며 살아갈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18절부터 23절까지의 말씀은 놀라운 변화를 보여줍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넷째 달의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과 일곱째 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이 유다 족속에게는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여기서 언급되는 네 번의 금식일은 유다 백성들에게 가장 아픈 기억들을 담고 있습니다. 넷째 달 금식은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진 날을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 39:2; 왕하 25:3-4). 다섯 째 달 금식은 성전이 불타고 파괴된 날을 애도하는 것이었습니다(왕하 25:8-9). 일곱째 달 금식은 총독 그달리야가 암살당한 날을 슬퍼하는 것이었고( 41), 열째 달 금식은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시작한 날을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왕하 25:1; 39:1).

 

이 네 번의 금식일은 한 민족의 완전한 몰락을 상징합니다. 성벽의 무너짐, 성전의 파괴, 지도자의 죽음, 그리고 포위의 시작. 이보다 더 절망적인 기억이 있을까요? 7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날들을 금식하며 슬퍼했습니다. 매년 이 날들이 오면 온 민족이 애곡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네 번의 슬픔의 날들이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완전한 역전의 기적입니다. 가장 아픈 기억이 가장 기쁜 축제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근본적인 회복의 역사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인생에도 이런 금식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사업이 망한 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날, 꿈이 무너진 날, 건강을 잃은 날... 우리는 이런 날들을 기억하며 여전히 아파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아픈 기억들조차도 감사와 기쁨의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더 놀라운 것은 20절부터 23절의 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그 후에 많은 민족들과 강한 나라들의 백성이 와서 예루살렘에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러 올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그 날에는 말이 다른 이방 백성 열 명이 한 유다 사람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심을 들었나니 우리도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열방이 부러워하는 공동체에 대한 예언입니다. ‘열 명이 한 유다 사람의 옷자락을 잡고’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심을 들었나니라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것이 회복 백성이 만들어내는 영향력입니다.

 

먼저 개인의 차원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진리와 화평을 사랑하며 살 때, 과거의 상처가 현재의 감사로 바뀝니다. 실업의 아픔이 새로운 기회에 대한 감사로 바뀝니다. 관계의 상처가 더 깊은 사랑을 배우는 통로가 됩니다. 실패의 경험이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자원이 됩니다.

 

사업에 실패했던 경험이 나중에는 하나님을 더 깊이 의존하게 된 소중한 시간으로 기억되기도 합니다. 그때의 아픔이 같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는 자산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금식이 잔치로 바뀌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공동체의 차원에서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갈등하던 공동체가 화목한 공동체로 바뀝니다. 직장에서는 저 팀은 뭔가 다르다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서로를 비난하고 경쟁하던 관계가 서로를 세우고 격려하는 관계로 바뀝니다. 가정에서는 이웃들이 부러워하는 가족 관계를 만들어갑니다. 부부가 서로 진리 안에서 솔직하게 소통하고, 화평을 위해 양보하며 살아갈 때, 그 가정은 주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가정이 됩니다. 교회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공동체가 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세상에 미치는 영향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저 사람에게는 뭔가 다른 것이 있다고 말하게 됩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어떻게 저렇게 평안할 수 있지?’라고 궁금해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정직하면서도 성공할 수 있지?’라고 놀라워합니다. ‘나도 저런 관계, 저런 공동체에 속하고 싶다고 부러워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23절의 말씀이 현실이 되는 순간입니다. “열 명이 한 유다 사람의 옷자락을 잡고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심을 들었나니 우리도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호기심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사람들이 실제로 경험하고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기적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리와 화평을 사랑하며 살 때,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순종을 통해 큰 변화를 만드십니다. 우리의 아픈 기억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증거가 됩니다. 우리의 회복된 관계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가능성의 모델이 됩니다. 우리의 변화된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됩니다.

 

이것이 회복 백성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무너진 땅에서 시작된 작은 회복이 결국 온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사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이 요청하시는 역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이 부조리한 세상에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가기를 원하십니다. 불의가 판치는 곳에 정의를,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가져가는 것이 회복 백성인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진리를 사랑하며 정직하게 일할 때, 그곳에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스며듭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화평을 사랑하며 용서하고 섬길 때, 그 가정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확산됩니다. 우리가 이웃과의 관계에서 진리와 화평을 실천할 때, 그 지역 공동체에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거창한 사회 운동이나 정치적 활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순종을 통해 이 땅에 당신의 나라를 조금씩 이루어가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옷자락을 붙잡고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신다고 고백하게 될 때, 그것은 단순히 개인의 성공이나 축복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문화를 경험하고 갈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복 백성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이 놀라운 일을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무너진 이 땅을 회복시키고, 부조리한 이 세상에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역사에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회복의 여정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말씀을 정리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선을 베풀기로 작정하셨으니( 8:15), 회복 백성은 진리를 사랑하고(8:16) 화평을 사랑하여(8:16-17), 우리의 금식이 절기로 바뀌는 은혜를 드러냅니다(8:19-23).

무너진 현실이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취업이 안 되고, 관계가 힘들고, 미래가 불안해도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복 주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회복 백성답게 사는 것입니다.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부터 조금 더 솔직해지는 것입니다. 가족에게, 동료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더 정직한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때로는 불편한 진실을 말해야 하고, 기존의 편안한 관계에 파장이 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화평을 사랑한다는 것도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갈등 상황에서 한 박자 쉬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내 권리보다 관계의 회복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길 역시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종종 네가 손해 보지 말라”, “당당하게 맞서라고 속삭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진리와 화평의 길을 걸으시다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16:33). 또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1:28)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진리와 화평을 사랑하는 길이 때로는 십자가의 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함께 걸어가시고, 그 길의 끝에는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금식을 잔치로 바꾸실 것입니다. 우리의 슬픔이 기쁨으로, 절망이 소망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우리 옷자락을 붙잡으며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다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무너진 땅에서 시작된 회복이 온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사가 우리를 통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각자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 진리와 화평을 사랑하는 회복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분 묵상

 

이제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조용히 하시며 내가 살고 있는 회복이 필요한 영역은 어디이며, 그곳에서 어떻게 진리와 화평을 사랑하며 살 것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관계나 상황이 있다면, 그 앞에서 어떻게 더 정직해질 수 있을지, 어떻게 화평을 만들어갈 수 있을지 하나님께 마음으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여러분 각자에게 주시는 작은 다짐 하나를 마음에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1분 묵상 - 조용한 배경음악)

 

이제 함께 마음으로 고백하겠습니다. “주님, 무너진 현실 속에서도 진리와 화평을 사랑하는 회복 백성으로 살겠습니다.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이 함께하심을 믿고 담대히 나아가겠습니다.”

 

공동 고백

 

계속해서 눈을 감고 우리가 회복이 필요한 관계와 상황들을 위해, 그리고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 용기를 위해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중보기도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스가랴서 8장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회복의 소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너진 현실 속에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선을 행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우리가 먼저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지도록 도와주소서. 하나님 앞에서 가면을 벗고, 가족과 동료들에게도 진실한 마음으로 다가가게 하여 주소서. 갈등 상황에서도 문제를 덮지 않되 진리를 기반으로 한 화평을 만드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소서. 비록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일지라도, 주님이 함께하심을 믿고 담대히 걸어가게 하여 주소서.

 

주님, 우리의 아픈 기억들과 실패의 경험들도 감사와 기쁨의 이유가 되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증거가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 각자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회복 백성답게 살아가며,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옷자락을 붙잡고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신다'고 고백하게 하여 주소서.

 

무너진 땅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정과 교회, 그리고 이 땅 위에 충만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