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본문: 빌립보서 4:1-9
핵심 구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4)
핵심 메시지: 기쁨은 상황의 결과가 아니라 선택의 결과입니다.
기쁨 배터리 충전율 0%인 이유
여러분, 안녕하세요.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잠시 여러분의 스마트폰을 보세요. 배터리 충전율이 몇 퍼센트인가요? 제 배터리 충전율은 75%네요.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마트폰에 배터리 충전율이 있다면, 우리 마음에도 기쁨 배터리 충전율이 있지 않을까요? 지금 여러분의 마음 상태를 배터리 충전율로 표현한다면 몇 퍼센트일까요? 제 마음의 기쁨 배터리 충전율은... 글쎄요, 오늘 아침에 확인해보니 한 60%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연속으로 취업에 실패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제 마음의 기쁨 배터리 충전율은 0%가 되었습니다. 친구들의 취업 소식을 들을 때마다, SNS에서 다른 사람들의 성공 스토리를 볼 때마다 충전율이 더 떨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교회에서 한 아이가 저에게 달려와서 "전도사님!"하며 안겼는데, 그 순간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분명 취업은 안 됐는데, 집안 사정은 여전히 어려웠는데, 왜 그 순간만큼은 기뻤을까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나는 언제부터 기뻐하는 것에 조건을 달기 시작했을까? "취업하면 기뻐하자", "연애하면 기뻐하자", "집 사면 기뻐하자"... 어린 시절엔 그냥 기뻤는데, 언제부터 기쁨을 미래로 연기하며 살게 되었을까요? 더 무서운 건, 우리가 스스로 기쁨에 제한을 걸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행복"이라는 단어가 참 많이 들리죠? 유튜브에서는 "행복해지는 10가지 방법", 인스타그램에는 "#행복스타그램", 직장에서는 "워라밸"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여전히 불안하고, 뭔가 채워지지 않는 느낌을 받습니다. 혹시 우리가 기뻐하지 않는 것이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무거운 얼굴이 성숙함이고, 밝은 웃음이 철없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하나님과 함께하고 싶었지만, 어떤 일 때문인지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왜 내 삶은 이렇게 힘들까?", "기도해도 달라지는 게 없는데 뭐하러 교회에 가지?" 이런 생각들이 들면서 하나님과 멀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으셨나요? 그런데 어느 날, 빌립보서를 읽으며 놀라운 발견을 했습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이 기쁨 배터리 충전율 100%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조건 없이 말입니다.
오늘 제가 전할 메시지는 "힘들어도 웃어라"는 그런 뻔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 포기한 기쁨을 다시 찾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기쁨 배터리 충전율이 몇 퍼센트든 상관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충전 방법을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1. 바울의 상황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은 빌립보서 4장 1절부터 9절까지입니다. 여러분, 이 편지를 쓴 바울의 상황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언제 사형 선고가 내려질지 모르는 상황이죠. 더 마음 아픈 것은 그가 평생 사랑했던 빌립보 교회에서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여성 지도자가 심하게 다투고 있었어요. 이름의 뜻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유오디아는 '순조로운 여행', 순두게는 '행운의 기회'라는 뜻인데, 정작 이들의 갈등 때문에 교회가 흔들리고 있었거든요.
바울에게는 이들이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었습니다. 운동 경기에서 승리자에게 주는 월계관처럼, 이들의 신앙 성장이 바울에게는 최고의 기쁨이었어요. 그런데 지금 그 기쁨이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바울이 편지에 쓴 말이 뭔가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여러분, 솔직히 이상하지 않나요? 만약 여러분이 바울의 상담사라면 뭐라고 조언하겠어요? "일단 감정부터 추스르세요",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지금은 기뻐할 때가 아니에요". 그런데 바울은 "다시 말하노니"라고 강조까지 합니다. 이게 정말 현실적인 조언일까요? 아니면 바울이 우리가 놓치고 있는 기쁨의 비밀을 알고 있는 걸까요? 오늘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2. 우리가 기쁨을 잃어버린 진짜 이유들
기쁨을 조건부로 만든 우리 (1-3절 중심)
바울이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한 이유가 뭘까요? 빌립보 교회는 특별한 교회였습니다. 자주 장사 루디아에 의해 세워진 교회로, 다른 교회들보다 여성들의 역할이 컸던 교회였어요. 유오디아와 순두게도 바울과 함께 복음 전파에 힘썼던 핵심 동역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심하게 다투고 있었어요. 성경은 구체적인 갈등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각자에게 개별적으로 "권하노니"를 반복한 것을 보면, 이들의 갈등이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고, 교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갈등의 구체적 이유는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둘 다 상대방이 먼저 변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들의 마음은 이랬을 겁니다. "저 사람이 먼저 사과하면 화해하겠어", "저 사람이 태도를 바꾸면 기뻐하겠어", "상황이 내 뜻대로 정리되면 그때 웃겠어". 우리도 똑같지 않나요? "상대방이 먼저 바뀌면 기뻐하겠다", "상황이 내 뜻대로 되면 기뻐하겠다",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면 기뻐하겠다". 언제부터 우리는 기쁨에 조건을 달기 시작했을까요?
더 무서운 건, 그 조건이 충족되어도 우리는 또 다른 조건을 답니다. 갈등이 해결됐는데 "또 다른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승진했는데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지", 결혼했는데 "아이가 생겨야지". 우리는 평생 기쁨을 내일로 미루며 살고 있습니다.
기쁨을 사치로 여기는 문화 (4절 중심)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헬라어로 '카이레테'는 현재 능동태 명령법이에요. 이건 선택사항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그런데 우리 문화에서는 어떤가요? "철없이 좋아하네", "현실을 모르는 소리", "나이 먹고 그런 걸로 기뻐해?". 언제부터 기뻐하지 않는 것이 성숙함이 되었을까요? 언제부터 무거운 얼굴이 진지함이고, 밝은 웃음이 경박함이 되었을까요?
직장에서도 그렇죠. 기뻐하면 "여유 있나 보네, 일 더 줘야겠다", 웃으면 "긴장감이 없어 보여", 즐거워하면 "프로답지 못해". 우리는 스스로 기쁨을 죄악시하고 있습니다.
염려를 정당화하는 습관 (6절 중심)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걱정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염려하는 게 책임감 아닌가?", "미래를 준비하려면 불안해야 하는 거 아닌가?". 부모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 걱정하는 게 부모 마음이야", "염려하지 않으면 무책임한 거야". 직장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회사 일 걱정하는 게 프로야", "불안해야 더 열심히 하게 돼". 우리는 염려를 미덕으로 포장했습니다. 우리는 불안을 책임감으로 착각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놓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비어있는 잔과 같습니다. 의도적으로 기쁨을 비워버리면, 그 빈 자리에 무엇이 채워질까요? 바로 염려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기뻐할 때가 아니야"라고 말하며 기쁨을 거부하는 순간, 그 자리에 걱정과 불안이 스며듭니다. 마치 진공상태를 싫어하는 자연의 법칙처럼, 우리 마음도 빈 공간을 그냥 두지 않아요. 그 결과 우리의 기쁨 배터리 충전율은 계속 떨어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도 기쁨 배터리 충전율 100%를 유지했는데,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도 충전율이 0%에 가깝습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요?
3. 바울의 혁명적 발견 - 기쁨의 진짜 정체
기쁨은 감정이 아닌 선택이다 (4절)
바울이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한 것에 주목해보세요. 만약 기쁨이 단순한 감정이라면, 어떻게 명령할 수 있을까요? 감정은 명령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바울은 기쁨을 명령합니다. 이것은 기쁨이 감정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기쁨을 선택하지 못할까요? 첫째, 우리는 기쁨을 결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기쁨이 따라온다", "문제가 해결되면 기쁨이 따라온다", "조건이 충족되면 기쁨이 따라온다". 이런 공식에 익숙해져 있어요. 기쁨은 원인이 있어야 생기는 결과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뻐할 이유가 없어", "상황이 좋아야 기뻐할 수 있어".
둘째, 그렇다고 근거 없는 기쁨이 있을 순 없습니다. 근거도 없는데 "기뻐하자!" 외친다고 기뻐지나요? 그건 가스라이팅이에요. 바울의 기쁨에는 확실한 근거가 있었습니다. 그 근거는 바로 "주 안에서"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잘못된 근거를 찾고 있었어요. "상황이 좋아서" 기뻐한다, "기분이 좋아서" 기뻐한다, "문제가 해결돼서" 기뻐한다. 이것들은 모두 변하는 근거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기쁨의 근거는 변하지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예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
셋째, 집중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기쁨을 선택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내게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상황이 어떤가?", "내 기분이 어떤가?", "내 문제가 해결됐나?". "나"에게 집중할 때는 기쁨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내 상황, 내 기분, 내 문제들은 계속 변하니까요. 하지만 "주님께 집중"할 때 기쁨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변하지 않으시니까요. 집중의 방향이 기쁨의 가능성을 결정합니다. 내게 집중하면 기쁨 불가능하고, 주님께 집중하면 기쁨 가능합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도, 교회 분열로 마음 아픈 바울도 주님께 집중했을 때 기쁨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기쁨은 저항의 행위다 (5절)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바울이 살던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만이 기쁨의 근원이었습니다. "황제의 평화"만이 진정한 기쁨을 가져다준다고 선전했어요. 시민들은 황제가 허락한 것만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감옥에서, 로마 근위대가 지키는 감옥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이것은 단순한 격려가 아닙니다. 이것은 정치적 선언입니다. 혁명적 저항입니다. "황제가 아니라 예수가 우리의 기쁨이다!", "제국의 허락 없이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다!".
그런데 저항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저항하려면 용기가 필요하고, 대안이 필요해요. 그런데 용기와 대안은 수동적 삶에서는 나타날 수 없습니다. 수동적인 사람은 이렇게 생각해요. "어쩔 수 없지 뭐", "시키는 대로 해야지", "나 같은 사람이 뭘 할 수 있겠어". 하지만 바울은 능동적이었습니다. 감옥에 갇혔지만 포기하지 않았어요. 상황이 절망적이었지만 주도권을 놓지 않았어요. 그리스도인은 본래 수동적 존재가 아닙니다. 능동적 존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빈곤한 영혼을 가진 존재는 정의, 도덕, 평등을 외치지만 그 내면은 공허하기 때문에 삶이 바뀌지 못하고 겉모습만 포장하는 "능동적인 척하는 수동형 인간"으로 살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말은 거창하게 하지만 실제 삶은 변하지 않고, 남을 비판하기는 잘하지만 자신은 그대로이며, "포장용 정의, 도덕, 평등"을 외치지만 삶으로는 살아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짜 그리스도인의 결국은 바리새인들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달랐습니다. 바울은 삶으로 살아내는 정의, 도덕, 평등이 있었어요. 감옥에서도 불의에 굴복하지 않았고, 로마 제국의 거짓 평화를 거부했으며, 하나님 나라의 참된 정의를 선포했습니다. 고난 중에도 원망하지 않았고, 적들을 위해서도 기도했으며, 자신의 이익보다 복음을 우선했습니다. 이것들은 말로만 외친 게 아니라 실제 삶으로 살아낸 것들이었습니다. 진짜 능동적 존재가 되려면 내면이 주님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진짜 기쁨은 삶으로 살아낼 때만 가능합니다. 진짜 저항은 삶으로 살아낼 때만 가능합니다.
기쁨은 하나님의 임재 확신이다 (5절 하반절)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바울의 기쁨의 비밀이 여기 있습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감옥에 혼자 갇혀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주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동역자들과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주님이 가까이 계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야곱의 하나님과 같습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밧단아람에 가서 살았을 때를 기억해보세요. 그 20년 동안 하나님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처럼 드러나게 언급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자신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살아갔습니다. 라반에게 속임당할 때도, 아내들 사이의 갈등을 겪을 때도, 경제적 어려움을 당할 때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은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함께 계셨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 감옥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천둥처럼 들렸던 건 아니에요. 기적적인 사건들이 매일 일어났던 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했습니다. 재판을 기다리는 불안한 시간에도, 동역자들의 소식이 끊어진 외로운 시간에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절망적인 시간에도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이것은 미래의 재림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의 임재를 말하는 거예요.
우리가 기쁨을 잃는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사건"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도 응답받을 때만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기적이 일어날 때만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문제가 해결될 때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구나". 하지만 하나님의 임재는 사건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야곱처럼, 바울처럼, 조용하지만 확실한 동행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일상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답답한 상황에도, 기도 응답이 보이지 않는 침묵의 시간에도 하나님은 가까이 계십니다. 여러분,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여러분이 느끼든 못 느끼든, 여러분이 믿든 안 믿든, 주님은 가까이 계십니다. 이것이 바울의 기쁨 배터리를 100%로 유지시킨 비밀이었습니다.
4. 기쁨 배터리 충전법을 발견한 사람
박정민씨(47세, 전 자동차부품 중소기업 생산팀장)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박정민씨는 15년간 근무했던 자동차부품 중소기업에서 구조조정으로 갑작스럽게 퇴직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고등학생 자녀의 교육비와 노부모 부양으로 경제적 부담이 컸던 상황에서 극심한 불안과 좌절감을 경험했습니다.
"처음 6개월은 정말 막막했어요. 퇴직금으로 당장 생활은 할 수 있었지만, 그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다행히 정부의 중소기업 지원 정책을 알게 되어 희망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자동차 산업 활성화 방안이 발표된 후, 그동안의 경험과 기술을 바탕으로 자동차부품 관련 컨설팅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컨설팅이라고 해서 바로 돈이 되는 건 아니었어요. 첫 해에는 월 100만원도 못 벌었어요. 예전 월급의 3분의 1도 안 됐죠."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지금, 박정민씨의 상황은 어떨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상황은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아요." 컨설팅 수입은 여전히 불규칙하고, 예전 회사 다닐 때 월급 400만원에는 여전히 못 미치며, 부모님은 더 연로해지셔서 의료비는 더 늘었고, 아들은 취업했지만 결혼 준비로 또 다른 경제적 부담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 기쁨 배터리 충전율은 그때보다 훨씬 높아졌어요. 80% 정도는 유지하고 있어요." 무엇이 달라졌을까요"처음엔 이 모든 문제들을 뚫고 지나가려고 했어요. 마치 바위를 뚫으려는 것처럼요. 다시 안정된 직장을 구해서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했어요. 부모님 병이 나으시기를 기도했어요. 컨설팅 일이 대박 나서 한 번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랐어요."
"하지만 바위는 뚫리지 않았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기도해도, 그 바위들은 그대로 있었어요.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복잡해졌어요." "그런데 어느 날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바위를 제거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바위를 감싸안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라는 걸요."
첫째, 불안정한 수입이라는 바위를 감싸안았습니다. "예전엔 '월급쟁이가 최고야'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불안정함이 오히려 저를 더 창의적으로 만들었다는 걸 알아요. 매달 다른 도전이 있고, 그때마다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어요." 둘째, 가족 부양 부담이라는 바위를 감싸안았습니다. "부모님 병간호를 짐이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그 시간들이 제게 진짜 효도가 뭔지, 진짜 사랑이 뭔지 가르쳐줬다고 생각해요." 셋째, 미래 불확실성이라는 바위를 감싸안았습니다. "예전엔 10년 후, 20년 후까지 다 계획하려고 했어요. 지금은 오늘 하루만 충실히 살면 하나님이 내일을 책임져주신다는 걸 믿어요."
"그 결과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바위들이 오히려 저의 지지대가 되었습니다. "지금 제가 컨설팅할 때 가장 큰 무기가 뭔지 아세요? 바로 제가 겪은 이 어려움들이에요. 어려운 사장님들을 만나면 '저도 그 마음 압니다'라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어요." "나무가 바위를 뚫지 못하자 바위를 감싸안고 성장하듯이, 저도 제 인생의 바위들을 감싸안고 성장했어요.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바위를 제거해주시지 않습니다. 대신 그 바위를 감싸안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기뻐할 수 있어요. 바위가 없어져서가 아니라, 바위와 함께 더 아름다운 작품이 되어가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에요. 이것이 진짜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상황을 바꾸는 기적이 아니라, 우리를 바꾸는 기적이요."
5. '기쁨 배터리 충전법' 4단계
박정민씨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배운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바위를 뚫으려 하지 말고 감싸안고 성장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의 기쁨 배터리를 충전할 수 있을까요?
집중의 방향 바꾸기 - "내 바위에서 주님의 능력으로" (4절)
첫 번째 충전법은 충전기를 올바른 콘센트에 꽂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주 안에서"입니다. 문제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마트폰 배터리를 충전하려면 충전기를 콘센트에 꽂아야 하죠? 아무리 좋은 충전기라도 콘센트에 꽂지 않으면 소용없어요. 우리의 기쁨 배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된 콘센트들이 있습니다. "내 문제 해결" 콘센트에 꽂으면 충전이 안 되고, "내 노력" 콘센트에 꽂아도 충전이 안 되며, "내 상황 개선" 콘센트에 꽂아도 충전이 안 되고, "다른 사람 변화" 콘센트에 꽂아도 충전이 안 됩니다. 올바른 콘센트는 "주님의 능력" 콘센트에 꽂는 것입니다. 그러면 충전이 시작됩니다.
매일 아침 자신의 "콘센트 체크"를 해보세요. "나는 지금 어디에 꽂혀 있는가?", "내 문제 안에 있는가, 주 안에 있는가?". 그리고 "주 안에" 들어가는 선언을 하세요. "나는 경제적 어려움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 있다", "나는 건강 문제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 있다", "나는 관계의 갈등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 있다". 실제적 변화는 문제 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 내 능력 의존에서 주님 능력 의존으로, 상황에 끌려다니는 것에서 주 안에서 안정감을 갖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주 안에 있을 때만 진짜 충전이 시작됩니다.
바위 뚫기에서 바위 감싸안기로 - "문제 제거가 아닌 역량 성장을" (6절)
두 번째 충전법은 기도 내용을 바꾸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구하느냐"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렇게 기도했어요. "하나님, 이 경제적 어려움을 없애주세요", "하나님, 이 건강 문제를 해결해주세요", "하나님, 이 관계의 갈등을 사라지게 해주세요", "하나님, 이 상황을 바꿔주세요". 이것은 "바위를 뚫어달라"는 기도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가르쳐준 기도는 다릅니다. "문제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품어낼 수 있는 역량,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의 인재로 성장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기도 내용을 전환해보세요. 경제적 어려움에 대해서는 기존에 "돈을 많이 벌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면, "적은 돈으로도 지혜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세요"로 전환하세요. 건강 문제에 대해서는 기존에 "병을 낫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면, "이 병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와 용기를 주세요"로 전환하세요. 관계의 갈등에 대해서는 기존에 "저 사람을 바꿔주세요"라고 기도했다면, "제가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로 전환하세요.
변화는 문제가 사라지기만 기다리는 것에서 내가 성장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상황 변화에만 의존하는 것에서 역량 개발에 집중하는 것으로, 수동적 자세에서 능동적 자세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제거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문제를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의 인재로 성장시켜주시는 분입니다.
수동형 인간에서 능동적 존재로 -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내 기준으로" (8절)
세 번째 충전법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생각하라"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마치 자신의 이야기처럼 떠드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스스로 기준을 가지고 생각해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만이 풍요로운 존재가 됩니다.
변화를 위한 방법으로는 첫 단계로 내 기준을 세우는 것입니다. 바울이 제시한 8가지 기준을 내 상황에 맞게 구체화해보세요. 참됨에 대해서는 "나는 어떤 상황에서 거짓말하지 않을 것인가?", 경건함에 대해서는 "나는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외할 것인가?", 옳음에 대해서는 "나는 어떤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것인가?", 정결함에 대해서는 "나는 어떤 마음가짐을 유지할 것인가?"라고 질문해보세요.
두 번째 단계는 남의 말 따라하기를 중단하는 것입니다. 중단해야 할 것들은 "어떤 유명한 사람이 그러던데...", "어떤 책에서 봤는데...", "요즘 사람들은 다 그래..."입니다. 시작해야 할 것들은 "내 경험으로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내 기준으로는..."입니다. 실제적 변화는 남의 기준에서 내 기준으로, 남의 경험에서 내 경험으로, 남의 생각에서 내 생각으로 나타납니다. 스스로 기준을 가지고 생각해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만이 풍요로운 존재가 됩니다.
사건 기대에서 관계 확신으로 - "기적까지 일어나 돕는 존재 되기" (5절)
네 번째 충전법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기적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했습니다. 기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기적만이 대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기적까지 일어나 돕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생각해보세요. 그가 그날 성전 미문 앞에 나가지 않았다면, 베드로와 요한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고침받을 수 있었을까요? 구원받을 수 있었을까요? 기적은 준비된 사람과 하나님의 때가 만날 때 일어납니다.
기적까지 일어나 돕는 존재가 되는 첫 단계로 매일의 "성전 미문"을 찾는 것입니다. 매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에 나가고, 기도, 말씀, 섬김, 예배의 자리를 지키세요.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준비하는 것입니다. 기적만 기다리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지혜롭게 대처하고, 수동적 기대가 아닌 능동적 동행을 하세요. 세 번째 단계는 기적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기적을 받는 사람에서 다른 사람에게 기적이 되는 사람으로 변화하세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매일이 기적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적이 일어납니다.
6. 작은 신실함의 힘
바울의 기쁨은 거창한 성공에서 오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의 작은 선택들에서 왔어요. 원망 대신 감사를 선택했고, 절망 대신 소망을 선택했으며, 고립 대신 연결을 선택했고(편지 쓰기), 수동 대신 능동을 선택했습니다.
우리가 일을 잘 안 풀려도 포기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진행 방식은 목표 설정에서 목표 달성까지 직선으로 쭉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 일이 진행되는 방식은 목표 설정, 진행, 실패, 제도전, 방향 변경, 이해, 갈등 있는 느낌, 원상 복귀, 찰떡기, 막판 스퍼트를 거쳐 목표 달성에 이르는 복잡한 과정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꾸준함을 우리는 매일 똑같은 양을 수행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어요? 꾸준함은 어느 날은 10%, 어느 날은 70%, 어느 날은 90%, 또 어느 날은 5%를 빠지지 않고 수행하는 것 아닐까요?
나무와 바위 사진을 다시 보세요. 그 나무가 매일 똑같이 자랐을까요? 봄에는 90% 성장했을 거고, 여름에는 70% 성장했을 거며, 가을에는 30% 성장했을 거고, 겨울에는 5% 성장했을 거예요. 가뭄 때는 10%도 못 자랐을 거고, 폭풍우 때는 오히려 상처받았을 거예요. 하지만 완전히 멈추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이 된 거예요.
실제 적용해보세요. 컨디션 좋은 날(90%)에는 아침 기도 30분, 성경 읽기 30분, 감사 일기 쓰기, 가족과 깊은 대화를 하세요. 보통 날(50%)에는 아침 기도 10분, 성경 1장 읽기, 감사 3가지 생각하기를 하세요. 바쁜 날(20%)에는 출근길에 기도 5분, 성경 구절 하나 묵상, "감사합니다" 한 마디를 하세요. 최악의 날(5%)에는 "하나님, 도와주세요" 한 마디라도 하고, 그래도 완전히 포기하지는 마세요.
5%라도 하는 것과 아예 안 하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매일 똑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뭔가는 하는 것입니다. 10%-90%를 오가며 지속하는 것이 진짜 작은 신실함입니다. 완벽함을 추구하지 말고 지속함을 추구하세요. 양을 걱정하지 말고 빠지지 않는 것을 걱정하세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포기를 두려워하세요.
7. 오늘부터 시작하는 기쁨 혁명
여러분, 오늘 우리가 발견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이 감옥에서 외쳤던 그 선포를 다시 한 번 들어보세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4)
오늘 우리가 깨달은 핵심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기쁨은 상황의 결과가 아니라 선택의 결과입니다. 기쁨은 감정이 아니라 결단입니다. 기쁨은 수동적 체험이 아니라 능동적 행위입니다.
바울은 감옥에서도 기쁨 배터리 충전율 100%를 유지했습니다. 왜냐하면 첫째, 주님께 집중했기 때문입니다(충전기를 올바른 콘센트에 꽂았습니다). 둘째, 바위를 감싸안았기 때문입니다(문제 제거가 아닌 역량 성장을 구했습니다). 셋째, 능동적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남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기준으로 살았습니다). 넷째,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입니다(기적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다섯째, 작은 신실함을 지켰기 때문입니다(10%-90%를 오가며 지속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일까요? 베드로전서 2장 9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왕 같은 제사장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CF모델과 같은 존재입니다. CF모델을 생각해보세요. 제품의 좋은 점을 직접 보여주고,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삶으로 증명하며, 사람들이 그 제품을 써보고 싶게 만들고, 그 제품의 가치를 자신의 경험으로 전달합니다. 하나님의 CF모델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직접 보여주고,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삶으로 선포하며,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싶게 만들고, "어두운 데서 기이한 빛으로" 인도받은 경험을 전달합니다.
우리가 선포해야 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들이 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기쁨, 바위 같은 문제를 감싸안을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 수동적 존재를 능동적 존재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능력, 기적의 통로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작은 신실함을 통해 큰 변화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오늘부터 여러분도 기쁨 혁명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상황이 좋아지기를 기다리지 마세요. 더 이상 조건이 충족되기를 기다리지 마세요. 더 이상 기분이 좋아지기를 기다리지 마세요.
바울의 선포를 여러분의 선포로 만드세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기억하세요. 기쁨은 상황의 결과가 아니라 선택의 결과입니다.
지금 이 순간, 주 안에서 기뻐하기로 선택하세요.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CF모델이 되기로 선택하세요. 여러분의 기쁨 배터리 충전율이 지금 몇 퍼센트든 상관없습니다. 주님께 집중하는 순간, 충전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CF모델이 되는 순간, 진짜 기쁨이 시작됩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고 이렇게 말하게 하세요. "저 사람을 보니 하나님의 기쁨이 진짜구나", "저 사람을 보니 하나님의 사랑이 살아있구나", "저 사람을 보니 나도 어두운 데서 기이한 빛으로 나아가고 싶어".
이것이 진짜 왕 같은 제사장의 삶입니다. 이것이 진짜 기쁨 혁명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삶입니다.
다시 한 번 바울의 선포로 마무리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여러분, 그런 하나님의 CF모델이 되어보는 게 어떠세요?
마무리 기도
하나님,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바울처럼 감옥 같은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고,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CF모델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더 이상 상황에 끌려다니지 않고, 주님께 집중하여 변하지 않는 근거 위에서 기쁨을 선택하게 하옵소서.
우리 인생의 바위들을 뚫으려 하지 말고 감싸안으며 성장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수동적 존재가 아닌 능동적 존재로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기적의 통로가 되고, 작은 신실함을 통해 큰 변화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10%-90%를 오가며 지속하는 진짜 꾸준함을 배우게 하시고, 완벽하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는 용기를 주옵소서.
오늘부터 우리의 기쁨 배터리가 주님의 사랑과 임재로 충전되어, 어떤 상황에서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옵소서.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는구나, 나도 믿어보고 싶어"라고 말할 수 있는 하나님의 CF모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