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나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4장 1-12절
중심 구절: “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데살로니가전서 4:3)
[도입] 당신은 어떤 '더 나은 나'를 꿈꾸나요?
여러분, 다이어리 꾸미기 해보신 적 있나요? 요즘 ‘다꾸’라고 하죠. 예쁜 스티커 붙이고, 형광펜으로 줄 긋고, 이번 달 목표 적고, 오늘 할 일 체크하고... 손 들어보세요. 다꾸 해보신 분? 아니면 갤럭시 탭으로 예쁘게 필기 정리하시는 분? 플래너에 스터디 계획 세우시는 분?
왜 우리는 이런 걸 할까요? 그냥 핸드폰 캘린더 쓰면 되는데 말이죠. 더 나은 나를 만들고 싶어서입니다. 계획적인 나, 성실한 나, 목표를 이루는 나가 되고 싶어서입니다.
사실 이것도 자기계발의 일부입니다. 거창하게 자기계발서를 읽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일상에서 자신을 가꾸고 있습니다. 아침 루틴 만들기, 100일 챌린지 참여하기, 감사 일기 쓰기, 운동 인증하기... 우리 모두는 ‘더 나은 나’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나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일입니다. 자신을 발전시키고, 목표를 세우고, 성장하려는 노력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실 성경도 “더 나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1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데살로니가전서 4:1)
“더욱 많이 힘쓰라.” 성경도 성장을 말씀하십니다.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더 나아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자기계발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무엇일까요? ‘무엇을 위해’, ‘어떤 기준으로’ 나아지느냐입니다.
세상은 명확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더 많이 벌고, 더 좋은 대학 가고, 더 멋진 외모를 가지고, 더 많은 팔로워를 가지면 ‘더 나은 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토익 점수를 올리고, 자격증을 따고, 운동하고, 다이어트하고, SNS를 관리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다른 기준을 제시합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더 나은 나’는 더 거룩한 나입니다. 더 많이 아는 나, 더 많이 가진 나가 아니라 더 거룩한 나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것이 진짜 ‘더 나은 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이 뭘까?’ 하고 고민합니다. 진로, 연애, 진학, 취업을 놓고 고민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명확히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거룩함. 이 단어가 좀 낯설게 느껴지시나요? 거룩함은 교회 안에서만 조용히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함은 내 일상이, 내 관계가, 내 선택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더욱 많이 힘쓰라.” 스마트폰을 생각해보세요. 업데이트 알림이 뜨면 어떻게 하시나요? 귀찮아서 ‘나중에’를 누르시나요? 그런데 업데이트를 안 하면 어떻게 될까요? 느려지고, 버그가 생기고, 보안이 취약해집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버전에 만족하면 안 됩니다. “더욱 많이 힘쓰라”는 것은 계속 업데이트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더 나은 나’가 되기 위한 3가지 업데이트를 살펴보겠습니다.
[본론1] 욕망이 아닌 존중으로, 관계는 어떻게 아름다워지는가?
3절부터 8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첫 번째 업데이트는 ‘관계’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말해서 요즘 ‘관계’가 쉽지 않죠? 특히 이성 관계가 그렇습니다. 연애하는 친구들 보면 어디까지가 괜찮은 건지, 어디서부터 선을 넘는 건지 헷갈립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가요? 넷플릭스 켜면, 유튜브 알고리즘 타면, 인스타그램 스크롤하면 온통 자극적인 콘텐츠들입니다. ‘이 정도는 괜찮지 않아?’, ‘다들 보는데 뭐 어때?’ 이런 생각 들 때 있지 않나요?
그런데 본문은 명확하게 말합니다. “음란을 버리고.” ‘음란’. 이 단어가 좀 강하게 느껴지시나요? 이 단어의 핵심은 “욕망에 의한 관계”입니다. 상대방을 인격체가 아닌 내 욕망의 대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야한 콘텐츠를 습관적으로 보는 것, 상대방을 나의 욕구 충족 수단으로만 보는 것, 관계에서 상대의 인격이 아닌 내 욕망을 우선시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음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관계는 무엇일까요? 4절을 보십시오.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거룩함과 존귀함으로’라는 이 단어들이 핵심입니다. 이것은 ‘욕망에 의한 관계’와 정반대입니다. ‘인격을 존중하는 관계’입니다.
상대방을 거룩하게, 존귀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즉, 상대방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귀한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내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받아야 할 인격체로 보는 것입니다. 연애할 때도, 친구 관계에서도, 심지어 아직 만나지 않은 미래의 배우자를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5절은 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여기서 ‘색욕을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욕망이 있다는 게 아닙니다. 욕망에게 끌려가는 것입니다. 내가 욕망을 통제하는 게 아니라 욕망이 나를 통제하는 것입니다. 억제할 수 없이,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네 감정에 솔직해”,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다릅니다. 내 욕망이 나를 이끌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야지, 욕망이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6절, 이 부분이 정말 중요합니다.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형제를 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욕망에 의한 관계는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관계를 망가뜨리고, 교회 공동체에 균열을 만듭니다. 왜 그럴까요? 욕망에 의한 관계는 상대를 인격체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누군가의 소중한 형제자매라는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왜 중요한지 아십니까? 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이 말씀을 가볍게 넘기지 마십시오. 관계에서의 거룩함을 무시하는 것은 단지 “좀 실수했네” 수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거룩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욕망에 의한 관계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번 주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먼저 내 마음을 점검하세요. 나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고 있나요?
직장인이라면 상사와 동료를 어떻게 대하고 있나요? 그들을 내 승진과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만 보고 있지는 않나요? 자영업을 하신다면 거래처 사람들을 단지 이익을 가져다주는 대상으로만 보고 있지는 않나요? 학생이라면 친구들을 스펙을 쌓기 위한 네트워킹 대상으로만 보고 있지는 않나요?
연애 중이라면 우리 관계를 돌아보세요. 이 관계에서 나는 상대를 존중하고 있나요?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대하고 있나요? 아니면 내 외로움을 채우고, 내 필요를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보고 있나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나요? 내게 위로를 주고, 도움을 주고, 인정을 주는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않나요?
이번 주, 내 주변 사람 한 명을 떠올려보세요.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나는 이 사람을 ‘욕망의 대상’으로 보고 있나요, 아니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격체’로 보고 있나요?
여러분, 이것은 “하지 말라”는 금지가 아닙니다. “더 나은 나”가 되라는 초대입니다. 욕망에게 끌려가는 나에서 벗어나, 인격을 존중할 줄 아는 나로 성장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관계에서 더 나아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본론2] 사랑은 어디까지 흘러가야 하는가?
9절과 10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
두 번째 업데이트는 ‘사랑’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합니다. “너희에게 쓸 것이 없다”는 것은 이미 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이 표현이 아름답지 않나요? 사람에게 배운 게 아니라 하나님께 직접 배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그들의 마음에 사랑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10절 전반부를 보십시오.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데살로니가 교회만이 아니라 온 마게도냐, 즉 다른 지역 교회들에게까지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10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 “더욱 그렇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잘하고 있는데 더 하라고? 네, 맞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특징입니다. 현재 레벨에서 만족하지 않는 것, 계속 업그레이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와이파이 신호를 생각해보세요. 공유기 가까이 있으면 신호가 강합니다. 하지만 멀어질수록 약해지죠.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 친한 친구들, 우리 교회 사람들에게는 사랑을 잘 실천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멀어지면 어떤가요? 다른 교회 사람들, 잘 모르는 사람들, 나와 안 맞는 사람들에게는 사랑이 약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 범위를 넓히길 원하십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미 ‘온 마게도냐’로 사랑을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더욱 그렇게 행하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은 고여있으면 썩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흘러가야 합니다. 우리끼리만 좋은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담을 넘어서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안에서는 어떤가요? 서로 잘 챙기고, 기도해주고, 함께 밥 먹고 정말 좋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질문이 있습니다. 이 사랑이 밖으로 흘러가고 있나요? 다른 교회와 교류하고 있나요? 교회 밖 친구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나요? 믿지 않는 친구들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있나요?
“더욱 그렇게 행하라.” 이것은 단순히 ‘더 열심히’가 아닙니다. ‘더 넓게’입니다. 사랑의 반경을 확장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번 주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사랑의 범위를 넓히는 것은 단지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우리를 이해만 하신 게 아니라, 직접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셨습니다. 우리가 있는 곳까지 오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추상적 관념으로 사람들을 이해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이 겪고 있는 현실적 문제를 직접 대면할 때 시작됩니다. 그때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아, 이게 이런 거구나.’ 그때 비로소 이타적인 사랑, 상대를 진심으로 안을 수 있는 사랑이 가능해집니다.
교회 안에서 범위를 넓히고 싶다면, 평소 안 가본 부서나 모임에 가보세요. 이번 주에 새로 온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다른 세대 성도님들과 대화하며 그들이 겪는 현실을 경험해보세요.
교회 밖으로 확장하고 싶다면, 다른 교회 예배나 모임에 직접 참석해보세요. 지역 사회 봉사 현장에 가서 그들의 삶을 대면해보세요. 비신자 친구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겪는 현실을 함께 경험해보세요. 그들이 있는 곳에 함께 가보세요.
여러분,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감정을 바탕으로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것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제 그것을 더 넓게, 더 깊게 실천할 차례입니다.
더 많은 경험을 통해 넓어진 범위로 진정한 사랑을 흘려보내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더욱 그렇게 행하라”는 말씀은 단순히 더 열심히 하라는 게 아닙니다. 지금 가진 것으로 나누되, 더 나은 것을 가질 수 있도록 성장하라는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을 키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처음엔 작게 시작해도 괜찮습니다. 한 사람, 한 곳에서 시작하세요. 지금 가진 것으로 나누세요. 그리고 더 나은 것을 가지기 위해 성장하세요. 그 경험이 쌓이면 여러분의 사랑의 범위는 자연스럽게 넓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사랑이 확장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본론3] 조용히, 성실히, 그렇게 빛나는 일상
11절과 12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세 번째 업데이트는 ‘일상’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이 부분이 제일 어렵지 않나요? 관계에서 거룩하게, 사랑을 확장하라는 것은 그래도 ‘신앙적’으로 들립니다. 그런데 “조용히 자기 일을 하라”, “손으로 일하라”는 것은 무슨 신앙 이야기인가 싶죠?
그런데 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거룩은 일상을 성실히 살아가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주일 예배당 안에서만 있는 게 아닙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학교에서, 직장에서, 집에서, 일상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11절을 다시 보십시오.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조용히 자기 일을 하라”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오지랖 부리지 말라’는 것이죠.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예수님이 곧 재림하실 거라고 믿고 일을 안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일에 참견하며 돌아다녔습니다. 바울은 그런 태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거룩은 타인에게 집중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집중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오지랖이 넓은 기독교인이 너무 많습니다. 남의 신앙생활을 평가하고, 남의 선택을 판단하고, 남의 삶에 이래라저래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의 삶에 재미가 없는 사람이 타인의 삶을 기웃거리는 법입니다. 내 삶이 충만하지 않으니까 남의 삶을 구경하고, 평가하고, 간섭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친구가 무슨 일 하는지 계속 신경 쓰고 있나요? 다른 사람 평가하고 비교하느라 시간 보내고 있나요? 남의 인생 구경하느라 내 일은 소홀히 하고 있나요?
“조용히 자기 일을 하라.” 이 말씀따라 충실히 살아갈 때 인생이 아름답고 특별해지며 거룩하게 빛날 수 있지 않을까요?
둘째, 과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과시는 스스로 영광을 받고자 하는 행동입니다.
물론 적당한 자기표현은 필요합니다. 내가 한 일을 나누고, 관계 속에서 나를 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선을 넘어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과시하며 관종처럼 살아간다면 어떨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고 싶어했던 사탄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닐까요? 이사야 14장 13-14절에서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왕좌를 높이리라...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와 같아지리라”고 외쳤던 그 교만의 길 말입니다.
우리는 종종 일 자체보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에 더 신경 씁니다. 공부하는 사진 찍어서 올리고, 봉사하는 모습 인증샷 남기고, 기도하는 모습 스토리에 올립니다. 그 자체가 나쁜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목적이 되면, 그래서 사람들의 인정과 좋아요를 갈구하게 되면 문제입니다.
‘조용히’라는 것은 하나님만 보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박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것입니다.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11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손으로 일하라’는 것은 실제로 일하라는 것입니다. 말로만, 계획으로만, 생각으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12절을 보십시오.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라는 것입니다. ‘외인’은 믿지 않는 사람들, 교회 밖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비신자 친구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볼까요? “쟤는 교회 다니는데 맨날 놀기만 해”, “크리스천이라면서 일은 대충하네”, “입으로는 하나님 사랑한다는데 행동은 다르네”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이것이 복음을 막습니다. 우리의 일상이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반대로 생각해보세요. 학교에서 제일 성실한 친구가 크리스천이라면 어떨까요? 회사에서 제일 정직한 직원이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아르바이트생 중에 제일 책임감 있는 사람이 믿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그들은 물을 것입니다. “너는 왜 그렇게 사니?” 그때 우리는 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싶어서.”
‘단정히 행하라’는 것은 비신자들 앞에서 흠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둘째,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경제적 자립입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 손 벌리며 “이것 해주세요, 저것 해주세요”만 한다면 건강한 신앙인이 될 수 없지 않을까요? 물론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셔서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과는 별도로, 다윗처럼 하나님께 자신의 것을 드리려고 하는 것이 성숙해진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까요? 다윗은 사무엘하 24장 24절에서 “내가 값 없이 얻은 것으로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것으로 드리고 싶어 했습니다.
자신의 것을 드리려면 누군가의 도움이나 적선에서 벗어난 자립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계속 노력하는 자립심을 키우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학생이라면 용돈을 감사히 여기고 아껴 쓰며, 가능하다면 아르바이트로 조금이라도 스스로 벌어보는 것입니다. 청년이라면 경제적 독립을 향해 나아가며, 부모님께 의존하는 것을 줄여가는 것입니다. 직장인이라면 정직하게 일하며 자신의 몫을 감당하고, 나아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여력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에게, 교회에, 사회에 부담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오히려 내가 가진 것으로 섬길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손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번 주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먼저 내 일에 집중하세요. 남과 비교하는 시간을 줄이고 내 일을 하세요. 과제나 업무를 미루지 말고 오늘 할 일은 오늘 하세요.
그리고 성실함을 실천하세요. 학생이라면 이번 학기 과제와 시험 계획표를 만드세요. 직장인이라면 오늘 업무에 최선을 다하세요. 딴짓을 줄이세요. 아르바이트한다면 시급 받는 만큼 정직하게 일하세요. 집에서는 부모님 심부름을 성실히 하세요. 은퇴하셨다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성실히 감당하세요.
또한 경제적 책임감을 가지세요. 이번 달 지출 계획을 세우고 지키세요. 충동구매를 줄이세요. 용돈 기입장을 써보세요. 가능하면 조금이라도 스스로 벌어보세요. 그리고 언젠가 내 것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기를 소망하세요.
그리고 비신자 친구들 앞에서 증거하세요. 이번 주에 학교나 직장에서 제일 성실한 사람이 되세요. 약속 시간을 지키세요. 맡은 일을 책임감 있게 마무리하세요. 불평 대신 감사를 표현하세요.
여러분, 이것이 바로 거룩함입니다. 주일에만 거룩한 척하는 게 아니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일상에서 성실하게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결론] 하나님은 당신의 작은 한 걸음을 기뻐하신다
우리는 이미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꾸하고, 플래너 쓰고, 아침 루틴 만들고, 100일 챌린지 하면서 말이죠. 이것은 좋은 일입니다. 문제는 방향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 가지 업데이트를 살펴봤습니다.
관계에서 더 나아지기, 욕망에 의한 관계가 아니라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사랑에서 더 나아지기, 현재에 머물지 않고 더욱 그렇게 행하며 사랑의 범위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일상에서 더 나아지기, 조용히, 손으로, 단정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더 나은 나’입니다. 세상은 말합니다. 더 예쁘고, 더 성공하고, 더 인기 있으면 ‘더 나은 나’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3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하나님의 뜻은 명확합니다. 거룩함입니다. 거룩함의 히브리어 ‘카도쉬(קָדוֹשׁ)’는 ‘구별되다, 분리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거룩함은 ‘홀리(holy)’라는 단어 그대로 ‘구별된, 유니크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답게 구별되어 사는 것입니다. 더 거룩한 나, 더 유니크한 나, 더 나다운 나, 그것이 진짜 ‘더 나은 나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도 여러분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작은 변화 하나하나를 기뻐하고 계십니다. 1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더욱 많이 힘쓰라.” 여러분, 이 말씀이 부담스럽게 들리시나요? “아, 또 더 해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닙니다. 이것은 부담이 아니라 초대입니다.
완벽한 버전 10.0이 되라는 게 아닙니다. 오늘 1.1이 되면 됩니다. 내일 1.2가 되면 됩니다. 스마트폰 업데이트를 생각해보세요. 한 번에 모든 게 바뀌나요? 아닙니다. 조금씩, 단계적으로 업데이트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에 완벽해지려고 하지 마세요. 오늘 한 걸음만 나아가면 됩니다. 그리고 꾸준하다는 것은 매일 똑같은 양을 해내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날은 많이, 어떤 날은 조금, 더하거나 덜하는 날들이 있더라도 매일 해내는 것입니다.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것, 그것이 ‘더욱 많이 힘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8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자동 업데이트 시스템이 내장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예’ 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 말씀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 ‘맞습니다’를 넘어서 말씀을 살아보는 것이 믿음이고 순종입니다. 성령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말씀에 동의하는 것을 넘어, 실제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자, 이제 구체적으로 실천할 차례입니다. 세 가지 업데이트 영역이 있습니다. 관계 업데이트, 사랑 업데이트, 일상 업데이트입니다. 이 중에서 하나만 선택하세요.
“목사님, 세 개 다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물론 궁극적으로는 세 영역 모두 중요합니다. 하지만 한꺼번에 다 하려다가 하나도 못하는 것보다, 하나를 제대로 하는 게 낫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가장 시급한 영역은 무엇인가요? 잠시 생각해보세요. 관계에서 경계선이 무너지고 있나요? 욕망에 의한 관계를 맺고 있나요? 그렇다면 관계 업데이트를 선택하세요. 사랑이 우리끼리만 머물러 있나요? 교회 밖으로 확장되지 못하고 있나요? 그렇다면 사랑 업데이트를 선택하세요. 일상이 흐트러져 있나요? 성실함이 부족한가요? 그렇다면 일상 업데이트를 선택하세요. 하나를 선택했다면, 이제 구체적인 실천을 정하세요.
많은 사람들이 to-do 리스트를 작성하듯이, 말씀을 살아내는 것도 항목을 정해서 이루어가는 것이 말씀을 내 삶에 현실화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이번 주 더 성실하게 살아야지’라고 막연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번 주 매일 아침 30분 일찍 일어나서 말씀 읽고 하루 계획 세우기’처럼 구체적으로 정하세요. ‘더 거룩하게 살아야지’가 아니라 ‘오늘부터 내 주변 사람 한 명을 인격체로 존중하며 대하기’처럼 명확하게 정하세요. ‘더 사랑해야지’가 아니라 ‘이번 주 목요일까지 평소 안 가본 교회 부서에 가서 그들의 이야기 들어보기’처럼 실천 가능하게 정하세요. 구체적일수록 좋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명확하게 정하세요.
여러분,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혹시 이번 주 실천하다가 실패하면 어떡하죠? 괜찮습니다.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업데이트가 실패하면 어떻게 하나요? 다시 시도하죠.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방향입니다. 넘어져도 괜찮습니다. 다시 일어나면 됩니다. 실수해도 괜찮습니다. 회개하고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우리를 원하시는 게 아닙니다. 성장하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더욱 많이 힘쓰라’는 것은 계속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것을 기억하세요. 여러분이 오늘 한 걸음 나아갈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오늘 욕망이 아닌 인격으로 누군가를 대했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오늘 평소 안 가본 곳에 가서 누군가의 현실을 경험했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오늘 남의 일이 아닌 내 일에 집중하며 성실히 살았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작은 것 같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작은 순종 하나하나를 보고 계십니다.
12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이 일상에서 거룩하게 살 때, 비신자 친구들이 봅니다. 그들은 물을 것입니다. “너는 왜 다르니?”, “너는 왜 그렇게 사니?”, “너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나니?”
그때 우리는 답할 수 있습니다. “나는 더 나은 나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믿어. 그분이 나를 변화시키고 계셔.” 이것이 진짜 전도입니다.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삶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에는 하나님의 더 큰 은혜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의 5달란트, 2달란트 받았던 종들을 기억하십니까? 주인은 그들을 기뻐하시며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더 나아질 때 더 큰 은혜로 응답하십니다. 작은 순종에 더 큰 기쁨으로, 작은 충성에 더 많은 것으로 맡기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더 나은 나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 여러분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더 나아지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한 걸음 내딛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변화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결단하세요. “나는 이번 주 관계에서 더 나아지겠습니다” 혹은 “나는 이번 주 사랑에서 더 나아지겠습니다” 혹은 “나는 이번 주 일상에서 더 나아지겠습니다”라고 결단하세요. 그리고 구체적으로 무엇을 실천할 것인지 정하세요.
그리고 시작하세요. 오늘부터, 지금부터 시작하세요. 완벽하지 않아도 됩니다. 느려도 됩니다. 작은 걸음이어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시작하는 것입니다.
3절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하나님의 뜻은 명확합니다. 여러분의 거룩함입니다. 더 거룩한 나, 더 나은 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오늘부터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기도]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더 나은 나’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더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관계에서, 사랑에서, 일상에서 더 나아지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가 오늘 결단한 것들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을 믿습니다.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작은 순종에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하게 하소서. 완벽함이 아니라 방향이 중요함을,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것이 꾸준함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이번 주, 우리 각자가 선택한 한 영역에서 구체적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게 하시고, 그 작은 변화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소서. 우리의 삶이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믿음을 증명하는 삶이 되게 하시고, 그리하여 우리의 일상이 복음을 증거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에 더 큰 은혜로 응답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오늘부터 시작하는 우리 모두와 함께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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