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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빛 설교/역대상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 역대상 23:1-32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본문: 역대상 23:1-32

 

"서로 다른 이야기, 하나의 진실

 

사랑하는 새벽빛예수교회 성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인생의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씨름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특히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말입니다. "이 직장을 그만둘까, 계속 다닐까?" "이 사람과 결혼해도 될까?" "아이 교육을 어떻게 시킬까?" "부모님 병간호와 내 커리어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순간들에 우리는 고민합니다. "내가 결정해야 하는 건가,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건가?" "기도해도 답이 안 오는데 어떻게 결정하지?" "내가 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다른 것 같은데..."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과 내가 노력한다는 것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다, CEO"라고 말하며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려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크리스천으로서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시다"라고도 고백합니다. 이 두 고백 사이에서 우리는 종종 혼란을 느낍니다.

 

여러분, 혹시 영화 "러브 액츄얼리"를 보신 적 있으십니까?

 

영화 러브 액츄얼리는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런던에서 벌어지는 여러 개의 전혀 다른 이야기들로 시작됩니다.

 

한쪽에서는 영국 총리 데이비드가 새로 부임한 젊은 여직원 나탈리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국가의 최고 권력자가 사랑 때문에 고민하는 모습이죠.

 

다른 한쪽에서는 락스타 빌리 맥이 매니저 조와의 우정을 확인하는 이야기가, 또 어떤 곳에서는 어린 소년이 첫사랑을 위해 드럼을 배우는 이야기가, 또 다른 곳에서는 새로 결혼한 부부가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해가는 이야기가 각각 따로따로 진행됩니다.

 

처음에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혼란스럽습니다. "이 이야기들이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거지? 왜 이렇게 여러 개의 다른 이야기를 동시에 보여주는 거지?"

 

그런데 영화가 끝날 무렵, 모든 인물들이 히드로 공항에서 만나면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 이 모든 다른 이야기들이 결국 "사랑"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연결되어 있었구나. 총리든, 락스타든, 어린 소년이든, 신혼부부든 -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사랑을 경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역대상 23장도 마찬가지입니다. 1절에서는 다윗이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는 정치적인 이야기가 나오고, 바로 이어서 2절부터는 레위인들의 성전 봉사 조직에 대한 종교적인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언뜻 보면 "이 두 이야기가 무슨 관련이 있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왕궁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의 이야기니까요.

 

하지만 오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두 이야기가 결국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하나의 주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다윗과 솔로몬, 그리고 38,000명의 레위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했는지, 그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도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시간이 다했을 때" - 다윗, "내 때가 다했다"는 인정

 

1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다윗이 나이가 많아 늙었을 때에 그의 아들 솔로몬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았고"

 

다윗은 여전히 능력 있는 왕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수십 년간 쌓아온 경험이 있었고, 백성들의 사랑도 받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만드셨습니다. 충분히 더 오래 왕 노릇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내가 더 왕 노릇을 해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많아 늙었을 때"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나이가 들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윗이 "내 때가 다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했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보통 "내가 더 할 수 있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다", "아직 내 때가 아니다" 또는 "아직 내 때가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아직 내 때가 오지 않았다"며 기다리기를 힘들어합니다. "언제 결혼할 수 있을까?", "언제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을까?", "언제 내 꿈을 이룰 수 있을까?" 하며 조급해합니다. 반대로 나이 든 사람들은 "아직 내 때가 지나지 않았다"며 자리를 내놓기를 힘들어합니다. "내가 아직 더 할 수 있는데", "젊은 사람들은 아직 경험이 부족한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능력이나 경험이나 성과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때를 겸손히 인정했습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여러분도 시기와 때의 문제로 고민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왜 아직도 결혼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까?", "왜 아직도 승진이 안 될까?", "왜 아직도 사업이 잘 안 될까?" 또는 반대로 "이제 그만 은퇴해야 하나?", "이제 그만 이 일을 그만둬야 하나?", "이제 그만 자녀들을 독립시켜야 하나?"

 

다윗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때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를 기다리고,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윗이 그냥 체념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는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면서 동시에 레위인들의 조직을 체계적으로 정비했습니다. , 자신의 때가 다했음을 인정하면서도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를 철저히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인정하되, 그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포기가 아니라 순종이고, 체념이 아니라 신뢰인 것입니다.

 

"그들이 원하지 않았던 자리" - 레위인들, "내가 원하지 않는 자리에서도"

 

이제 레위인들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6절부터 보면, 다윗은 38,000명의 레위족을 체계적으로 조직했습니다. 24,000명은 성전 공사 감독으로, 6,000명은 행정관리와 재판관으로, 4,000명은 문지기로, 4,000명은 찬양대로 배치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현실적인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38,000명이 모두 자신에게 배정된 역할에 만족했을까요?

 

생각해보십시오. 24,000명의 성전 공사 감독들은 매일 먼지 속에서 힘든 육체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손은 거칠어지고, 옷은 더러워지고, 몸은 지쳐갔을 것입니다. 4,000명의 문지기들은 밤샘 근무를 해야 했고,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반면 4,000명의 찬양대는 어떠했을까요? 상대적으로 화려하고 주목받는 역할이었습니다. 깨끗한 옷을 입고, 아름다운 음성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박수도 받고, 인정도 받았을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아마 모든 사람이 만족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문지기 중 누군가는 "왜 나는 밤새 문을 지켜야 하고, 저들은 아름다운 찬양을 부르는가?"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성전 공사 감독 중 누군가는 "매일 먼지 속에서 일하는데, 찬양대는 깨끗한 옷을 입고 있구나"라고 부러워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 아닙니까? "왜 나는 주일학교 교사이고 저 분은 찬양 인도자인가?", "왜 나는 뒤에서 설거지하고 저 분은 앞에서 기도하나?", "왜 나는 이런 힘든 일을 하고 다른 사람들은 편한 일을 하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나는 야근을 해야 하고 저 사람은 정시에 퇴근하나?", "왜 나는 승진이 안 되고 저 사람은 빨리 승진하나?", "왜 나는 이런 어려운 부서에 있고 저 사람은 좋은 부서에 있나?"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왜 나는 아이들 뒷바라지만 하고 남편은 자기 일만 하나?", "왜 나는 부모님 병간호를 해야 하고 형제들은 모르는 척하나?"

 

하지만 31절을 보십시오. "안식일과 초하루와 절기에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때에 규례대로 항상 여호와 앞에 정수를 갖추어 섬길지며"

 

"항상 여호와 앞에" - 이것이 핵심입니다. 레위인들은 자신들의 역할이 마음에 들든 그렇지 않든, "항상 여호와 앞에" 서는 마음으로 그 일을 감당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내가 원하지않는 자리에서도 순종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내 만족도나 선호도가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그 자리에 두셨다는 믿음이 기준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맹목적인 체념이나 포기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레위인들 중에는 분명히 처음엔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자신의 역할에서 의미를 찾았을 것입니다.

 

문지기는 "내가 성전을 지키는 중요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구나"라고 깨달았을 것이고, 성전 공사 감독은 "내가 하나님의 집을 짓는 거룩한 일에 참여하고 있구나"라고 인식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역할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여러분이 처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혹시 다른 사람들의 자리가 더 좋아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레위인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도 처음엔 불만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항상 여호와 앞에" 서는 마음으로 그 자리를 지켰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 일의 참된 의미와 기쁨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진짜 주인을 찾아서" - 진정한 신앙, 누가 주인인가의 문제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며 살 수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갈멜산의 교훈을 기억해야 합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바알 선지자들은 온갖 유별난 행위를 했습니다. 큰 소리로 부르며 아침부터 정오까지 떠들어댔고, 제단 주위에서 뛰어다니며, 심지어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여 피를 흘리기까지 했습니다. 정말 열심이었습니다. 정말 유별났습니다. 누가 봐도 "저 사람들은 정말 열심히 신을 섬긴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도 없고 돌아보는 자도 없었더라"고 열왕기상 18:29은 기록합니다. 그 모든 유별난 행위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의 진짜 문제는 단순히 유별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자신의 노력으로 바알을 움직여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큰 소리로 부르면 바알이 들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춤을 추면 바알이 응답할 것이다", "내가 이렇게 피까지 흘리면 바알이 감동할 것이다" - 결국 자신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겉으로는 신에게 간절히 기도하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대단한 신앙심으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우상숭배자들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엘리야는 어떻게 했습니까? 조용히 나아가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엘리야의 고백입니다. "주께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 완전히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자신은 종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자신의 노력이나 열심으로 하나님을 움직이려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한 것입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모든 것을 태웠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의 능력은 유별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주인인가를 분명히 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우리가 바알 선지자들처럼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내가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이다", "내가 이렇게 헌금하면 하나님이 축복하실 것이다", "내가 이렇게 봉사하면 하나님이 인정하실 것이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면..." - 결국 "내가"가 주어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신앙생활은 겉으로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주인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유별난 신앙생활은 갈멜산의 바알 선지자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신앙은 어떤 모습일까요? 열왕기하 5장의 포로 소녀를 기억하십시오. 그 소녀는 시리아 군대장관 나아만의 집에 포로로 끌려간 어린 소녀였습니다. 이름도 없고, 신분도 비천하고, 아무런 권력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 소녀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을 믿으세요! 교회에 나오세요! 회개하세요!"라고 외치지 않았습니다. 종교적인 구호를 외치지도 않았고, 유별난 행동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히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진심 어린 관심으로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한 마디를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가서 나병이 치유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아노니 온 천하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외에는 없나이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일상에 충실했던 한 소녀의 자연스러운 한 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나아가 두 나라의 관계까지 변화시킨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진정한 모습입니다. 포로 소녀처럼 일상에 충실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포로 소녀는 원수의 집에서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복수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맡겨진 일에 성실하게 임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관심과 사랑으로 주인을 대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일상에 충실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정직하게 일하는 것, 동료가 힘들어할 때 진심으로 관심을 갖는 것, 어려운 일 앞에서도 성실하게 처리하는 것 - 이 모든 것들이 일상에 충실히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가정에서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 배우자와 갈등할 때 먼저 사과하는 마음을 갖는 것, 자녀와 대화할 때 진심으로 들어주는 자세 - 이 모든 것들이 일상에 충실히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일상에 충실히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통해 역사하실 공간이 만들어집니다. 특별한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성실함과 진실함과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매일 내리는 선택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진리는 명확합니다.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세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 다윗처럼 하나님의 때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를 기다리고,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언제 결혼할까?", "언제 승진할까?", "언제 은퇴할까?" - 이 모든 질문 앞에서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둘째, 레위인들처럼 내가 원하지 않는 자리에서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 만족도나 선호도가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그 자리에 두셨다는 믿음이 기준인 것입니다. "항상 여호와 앞에" 서는 마음으로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셋째, 나아만의 포로 소녀처럼 일상에 충실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움직이려 하지 말고,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맡겨진 일에 성실하며, 자연스러운 관심과 사랑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삶의 주인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한 번 답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매 순간순간 우리가 내려야 하는 결정입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직장에서 일할 때, 가족과 대화할 때, 어려운 선택 앞에 섰을 때 - 그 모든 순간에 "내가 주인인가, 하나님이 주인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번 한 주간, 여러분의 모든 선택과 결정 앞에서 이렇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결정이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하나님이 주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일상에 충실히 살아가는 복된 한 주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문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진정으로 아버지를 삶의 주인으로 인정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윗처럼 아버지의 때를 겸손히 인정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내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를 기다리고 순종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조급해하지 말고, 집착하지도 말고, 아버지의 완벽한 타이밍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레위인들처럼 내가 원하지 않는 자리에서도 "항상 여호와 앞에" 서는 마음으로 순종하게 하옵소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불평하지 말고, 아버지께서 나를 이 자리에 두신 이유를 찾아가며 최선을 다하게 하옵소서.

 

포로 소녀처럼 일상에 충실히 살아가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내 노력으로 아버지를 움직이려 하지 말고,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맡겨진 일에 성실하며, 자연스러운 관심과 사랑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 자체가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바알 선지자들처럼 유별난 종교적 행위로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려 하지 말고, 엘리야처럼 아버지가 주인이시고 우리는 종임을 분명히 인정하는 겸손한 신앙을 갖게 하옵소서.

 

매일매일, 매 순간순간 "내가 주인인가, 하나님이 주인인가?"를 선택하는 순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모든 순간에 아버지를 선택하는 지혜와 용기를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